‘어이 이장 있는가?’ ‘누구지?’ 17년 전 이장을 아직도 이장이라 부르니 ‘한 번 이장은 영원한 이장’으로 참 오래 간다. 처음 시골로 이사 왔을 때 아무 연고가 없어 그저 살 부딪히며 사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전주이씨 가까운 혈연’ 이라며 굳이 내 손을 잡아주던 마음 좋은 동네 형님 이해웅씨다.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아내를 30년 째 돌보며 농사와 토종벌을 치시는, 법 없이 사실 수 있는 순박한 동네 분이다. “송이 따 왔어. 소주 한 잔 해” “그 비싼 자연산 송이버섯을 소주 안주로 잡숫다니요! 비싸게 파시지요” “아니야 이장하고 한 잔 하는 게 더 나아”
급하게 아내가 후라이팬에 살짝 데쳐 상을 차린다. 예고 없이 아무 때나 오셔서 소주 한잔 같이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좋은 형님이지만 송이버섯이 나오는 곳은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자기 새끼한테도 알려 주지 않는다며. 그렇지만 같이 먹자하며 가을이면 송이버섯뿐만 아니라 토종꿀도 내 놓으시고, 늘 나를 정성스럽게 대해 주신다. 참 따뜻한 분.
이해웅 형님과의 일화.
지금은 ‘횡성 한우 축제’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1997년 횡성 갑천으로 이사 왔을 때는 ‘태풍 문화제’라는 이름의 향토 축제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횡성군 담당자가 찾아와 부탁해서 축제 기간 동안 곤충 전시를 해 주었다. 곤충이란 이름보다는 농사에 해를 끼치는 해충, 벌레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횡성에 터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지역 주민들 사이에 홀로세생태학교와 나에 대한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다. 전시회장 입구에 서있던 내 등 뒤로 나를 본 적 없는 동네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홀로세가 뭐하는 데야? 나비 키운다고 서울서 기자하다가 갑천으로 들어왔다는데 홀로 뭐 하겠다고 한다나? 그 징그러운 벌레로 뭐 하겠다는 건지. 땅 값도 몇 십 배 비싸게 사서 들어왔다는데 한 마디로 헛똑똑이, 미친 놈이지 뭐" 미친 놈 취급하는 건 섭섭한 마음 있지만 그냥 웃고 이해하면 되는데 땅값을 수 십 배나 비싸게 산, 진짜 멍청한 헛 똑똑이란 말에는 은근 울화가 치밀었다. 나에게 땅을 판 부동산업자는 그 당시 가장 비싼 차를 사서 횡성에서 활보하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다방에 들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비싼 자가용을 타고 거들먹거리며 다니는 그 부동산 업자를 볼 때마다 내 이야기가 자동으로 나오니 미칠 노릇이다. 아직도 동네 친구들은 나를 놀린다. ‘어이 헛 똑똑이!’ 그 때 산 땅값이 20년 지난 지금과 비슷하다.
만일 그 때 제 값 주고 충분한 터를 연구소 부지로 마련하였다면 환경에 미치는 외부 압력을 충분히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1997년 집 한 채 있었던 동네엔 많은 외지인이 들어와 현재는 20가구가 넘고, 15년 이상 내가 그렇게 막았던 도로를 만드는 바람에 전체적인 주변 환경이 나빠졌고 오고 가는 자동차 바퀴에 깔리며(Road Kill) 생물들 목숨도 위태로워졌다. 외길인데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속도를 내다보니 접촉 사고도 끊이질 않는다. 다니기 좋자고 고집 부려 만들었지만 가장 위험한 길이 되었다. 사람에게도 숲 속 생명들에게도.
어려서 뱀에 물려 팔을 자를 수밖에 없는 부동산업자의 딱한 사정을 듣곤 마지막 남은 계약금을 치를 때는 웃돈까지 얹어주고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사시라’ 고 덕담을 했으니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 당시 나를 ‘헛똑똑이, 미친 놈’으로 취급했던 양반이 이해웅 형님. 동생 이해영 형님과 사촌지간인 이해운씨와도 20년 째 가깝게 잘 지내고 있다.
17년 전 처음 이장을 시작하면서 동네 사업을 왕성하게 추진했다. 소소한 마을 안길이나 농업용 수로, 보 공사 등 작은 일 이외에 마을 회관, 보건소와 농산 물 집하장까지 큰 공사가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마을 회관을 지을 때는 동네 토박이 공사업자가 내가 서울 지인의 도움으로 만들어 온 설계도대로 하지 않고 제 멋대로 공사를 하는 바람에 쌓아 올린 돌을 부수고 다시 쌓자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장이 난데 없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며 동네가 떠나 갈 듯 험한 욕설로 위협하는 바람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과 아내가 무서움에 떨었다. 그냥 참으면 계속해서 제 멋대로 하다가 부실공사가 될까봐 넘어 갈 수 없었다. 신문사 근무 시절 수없이 경험했던 일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고 그 정도의 위협이야 대수롭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과 강권으로 쌓았던 벽돌을 부수고 새로 올렸다. 나중에는 공사 중 문틀 하나 창문 하나까지 하나하나 모두 나에게 물어보는 바람에 귀찮을 정도였다. 불편했던 관계가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는 사이로 전화 위복이 되어 마을 회관은 튼튼하게 잘 지어졌고 지금도 잘 쓰고 있다.